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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풍 가는 날

생각이머무는곳

글 소풍 가는 날

인생의 깊이는 세월이 아니라 성찰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을 먹으며 살아간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지면 어느새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은 머리카락을 희게 만들고 얼굴에 주름을 새긴다. 그러나 오래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깊이 있는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그 부끄러움 앞에서 스스로를 고쳐 나간 만큼 깊어진다.

우리는 한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는다. 기쁜 날도 있었고, 가슴이 무너지는 슬픈 날도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면서도 남에게 준 상처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다. 남의 잘못에는 엄격하면서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나 역시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는 쉬웠지만, 정작 내 잘못을 인정하는 일에는 인색했다. 상대방의 잘못은 분명하게 보면서도 내 행동을 정당화할 이유부터 찾곤 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보고 달렸다. 남보다 잘살고 싶었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었으며,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믿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쫓기다 보니 가족의 외로움을 살피지 못했고, 곁에 있는 사람의 고마움조차 잊은 채 살아왔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마음을 헤아리는 데 소홀했다. 나를 위해 애쓴 사람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고, 사소한 말 한마디로 소중한 인연을 멀어지게 한 적도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풀릴 오해를 자존심 때문에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 두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옳은 사람이고 싶었다. 잘못을 인정하면 지는 것 같았고, 먼저 사과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자존심이었다는 것을.

그 자존심 때문에 멀어진 사람도 있었고, 끝내 전하지 못한 미안함도 남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주장만 앞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한 번만 더 헤아렸더라면, 멀어진 인연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곁에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떠나간 사람을 모두 다시 불러올 수도 없다. 다만 그때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오늘의 삶을 고쳐 나가는 일은 아직 내 몫으로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남과 다투어 이기는 것이 언제나 옳은 일은 아니었으며, 남보다 많이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더 큰 용기였고, 상대방의 아픔을 헤아리는 일이 눈앞의 성공보다 값질 때도 있었다.

인생을 깊이 있게 산다는 것은 잘못 없이 살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명으로 덮어 두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다.

진정한 성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반성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그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과연 얼마나 정직하게 살아왔는가.

남에게는 진실을 말하라고 하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는 듣기 좋은 변명만 늘어놓지 않았는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내 마음만은 평화롭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물음 앞에 서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살아온 날들이 길어질수록 잘한 일보다 미처 바로잡지 못한 잘못이 먼저 떠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일이 반드시 후회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잘못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재산은 넉넉하지 않아도 마음만큼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과 서운함을 더 오래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다만 잃고 얻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과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것을 조금씩 구별하게 된다.

젊은 날에는 남보다 앞서는 일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내 뜻을 관철하는 데 애썼다면, 지금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사랑의 실천인지 알 것 같다.

한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백 년의 세월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대로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며, 하루하루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면 그 삶은 충분히 깊고 아름다울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살아온 날들의 숫자로만 헤아릴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도 삶의 마지막에 이르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때 마음에 남는 것은 함께 웃었던 사람들의 얼굴과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 그리고 끝내 풀지 못한 미안함일 것이다.

내가 떠난 뒤에도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그 사람 덕분에 힘든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외로운 날에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 적이 있는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모른 체하지 않았는가. 잘못했을 때 자신의 체면보다 상대방의 상처를 먼저 생각하며 용서를 구한 적이 있는가.

삶을 돌아볼수록 거창한 업적보다 이런 작고 평범한 일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말보다 어려울 때 건네받은 손길이고, 높이 쌓은 명예보다 힘든 시절에 느꼈던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봄을 맞이하고, 몇 번의 가을을 더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나간 날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남은 날을 살아가는 태도는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제의 잘못을 오늘 깨달았다면 늦었다고만 할 일은 아니다. 오늘의 부족함을 내일 조금이라도 고쳐 나갈 수 있다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성장할 수 있다.

세월이 얼굴에 주름을 새긴다면, 성찰은 마음에 삶의 무늬를 남긴다. 그 무늬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후회와 용서가 있으며,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선 날들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무늬야말로 한 사람이 세월을 그저 흘려보내지만은 않았다는 조용한 증거가 아닐까.

이제는 오래 사는 것만을 바라기보다 남은 날들을 깊이 있게 살아가고 싶다. 많은 사람에게 이름을 남기기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싶다. 남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내 허물을 먼저 살피고,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그 말로 누군가 상처받지는 않을지 돌아보며 살고 싶다.

물론 앞으로도 실수할 것이다. 때로는 욕심을 부리고,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며, 뒤늦게 후회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그런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하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표현하며, 미안한 마음이 들면 더 늦기 전에 사과하고 싶다. 이런 평범한 일들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남은 인생을 조금 더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돌아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후회가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완전한 삶은 아니었다. 잘못도 많았고 후회도 남았다. 그러나 내 허물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한마디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내 삶을 깊게 만든 것은 오래 살아온 세월만이 아니었다.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했던 순간들, 용서를 구하고 다시 살아 보려 애썼던 시간들이었다.

인생의 깊이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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