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삶 · 주일을 기다리며
또 한 주가 멀어지고 일요일이 다가온다.
세월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하게 흘러간다. 월요일이 시작되는가 싶으면 어느새 주말이고, 그렇게 지나간 날들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삶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특별히 기다리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요일이 가까워지면 마음 한구석에 작은 설렘이 인다.
이민 생활이란 참 묘하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은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알고 지내는 사람은 있어도 속마음을 나눌 사람은 드물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돌아서면 미처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남는다.
고국에서는 별다른 약속 없이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마주친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마음이 허전한 날이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때와 장소가 필요하다. 저마다 살아가는 형편이 다르고, 하루를 견디는 방식도 다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인연을 맺는 일은 조심스러워지고, 오래된 인연마저 하나둘 멀어진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의 끈은 점점 가늘어진다.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당겨볼 수도 없는 끈이다.
그나마 일요일이면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는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일요일이 기다려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곳에 가면 반갑게 인사를 나눌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주간 잘 지내셨어요?”
그 짧은 인사가 때로는 긴 위로가 된다.
크게 나눌 이야기가 없어도 괜찮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건강을 묻고, 지난 한 주의 소소한 일들을 주고받는다. 누군가 내 안부를 물어주고, 나 또한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까.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근심이 없겠는가.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고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가 없겠는가.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남몰래 한숨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운 사람,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말 못 할 후회에 젖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속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아픔을 모두 꺼내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묻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되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건네는 미소 하나가 위안이 된다. 살아온 사연은 서로 달라도 외로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 고백한다. 한 주 동안 참아왔던 서러움도, 남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걱정도, 미처 감사하지 못했던 작은 일들까지 기도에 담는다.
나 또한 두 손을 모으고 지난 한 주를 돌아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누구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지, 감사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자신에게 묻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더 많은 것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잃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앞선다. 큰 기쁨을 바라기보다 남은 날들이 지나치게 고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마음이 메마르지 않고, 사람을 향한 따뜻함만은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다림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 같다.
젊은 날에는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을 기다렸다. 더 나은 내일과 새로운 기회를 기다렸고, 때로는 막연한 성공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 늘 보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지난주와 다름없는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한 주를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그렇다고 외로움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조용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 전까지 나누었던 웃음소리는 멀어지고, 각자는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일요일도 지나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전보다 조금 가벼워져 있다.
누군가 특별한 위로의 말을 해준 것도 아니고, 오래 묵은 고민이 해결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 나 혼자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마음에 남는 것이다.
어쩌면 이민 생활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런 용건 없이 찾아가도 반겨주는 사람, 사소한 이야기를 오래 나눌 수 있는 자리, 별일 없느냐고 물어주는 익숙한 목소리. 살아보니 그런 평범한 것들이 오히려 귀하다.
인연이란 반드시 깊어야만 소중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 나누는 짧은 인사에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을까. 나 역시 누군가의 안부를 진심으로 물어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내 외로움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정작 다른 사람의 쓸쓸함에는 무심하지 않았을까.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누군가에게 조금 더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다.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더라도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안부를 묻고 싶다. 어쩌면 나의 작은 관심이 누군가에게는 일주일을 견디는 위안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또 한 주가 저물어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바라는 것은 줄어드는데, 이상하게도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은 쉬이 늙지 않는다. 만나면 반가운 얼굴이 있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자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다.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일요일이 가까워지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설렌다.
이번 주에도 저마다 말 못 할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삶의 무게를 다 알 수는 없어도, 서로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작은 위안이 되리라.
어쩌면 기다림이란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 내 삶에 반갑게 맞이할 사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 일요일에도 나는 그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한 주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조용히 기도에 실어 보낼 것이다.
사람에게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사람에게서 받은 작은 온기는 감사로 간직하면서.
그렇게 또 한 주를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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