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한 하루가 저물었다. 별다른 기쁨도, 마음을 무겁게 할 걱정도 없었던 하루였다. 젊은 날에는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보람 있는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무 탈 없이 하루를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분주했던 몸을 쉬게 하고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내려놓는다. 온종일 시간에 쫓기듯 살아오다가 비로소 나만의 여유를 마주한다.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깊어진 가을밤이 거리를 감싸고 있다.
밤거리는 한산하다. 낮 동안 사람들의 발길과 자동차 소리로 분주했던 거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고요에 잠겨 있다.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어둠을 가르다 멀어지고, 가로등만이 은은한 빛을 드리우며 텅 빈 거리를 지키고 있다.
그 가로등 아래 노랗게 물든 가로수 한 그루가 홀로 서 있다. 가지마다 매달린 잎들은 가을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지만, 아래로 축 처진 나뭇가지에는 한 계절을 견뎌 낸 피로가 묻어나는 듯하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나무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이 고요히 서 있다.
나는 한동안 그 나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봄이면 여린 새잎을 틔우고, 여름이면 짙푸른 그늘을 드리웠을 나무다. 뜨거운 햇볕과 거센 비바람을 묵묵히 견디며 계절의 한가운데를 지나왔을 것이다. 이제는 무성했던 푸른 잎을 노랗게 물들이고,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문득 그 나무의 모습에서 내 삶의 한 자락을 발견한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바라보며 바쁘게 살아왔다. 이루고 싶은 꿈도 많았고, 붙잡고 싶은 시간도 많았다. 때로는 작은 성취에 기뻐했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계절을 지나오는 동안 세월은 어느덧 내 삶에도 가을의 빛깔을 입혀 놓았다.
한때는 화려하게 빛나는 삶을 부러워했지만, 이제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모습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무성했던 잎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나무는 떠나는 계절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자리에 서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문득 희망 하나가 마음속에 피어난다.
지금은 단풍이 들어 가지마저 축 처진 가로수이지만, 차가운 겨울을 묵묵히 견디고 나면 다음 해 봄에는 파릇파릇한 새잎을 틔워 다시 나를 반겨 주겠지.
앙상한 가지에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고, 봄바람에 어린 잎들이 살랑거릴 때면 오늘 밤 쓸쓸하게 서 있던 나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계절은 떠나지만 생명은 그 자리에 남아 다시 시작할 봄을 기다린다.
그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우리의 인생도 저 나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때로는 홀로 긴 겨울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잎을 떨군 나무가 생명을 잃은 것은 아니듯, 삶의 열정이 잠시 잦아들었다고 해서 우리 안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에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는 있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꿈을 품을 수 있고, 작은 기쁨에 웃을 수 있으며, 내일을 기다리는 설렘을 간직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곁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 많아지고,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도 깊어진다. 지나온 날들이 모두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후회와 아쉬움이 남은 순간도 있었고, 말없이 견뎌야 했던 외로운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날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이루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삶의 평화란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기쁨과 아픔을 모두 품고도 마음의 고요를 잃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가로등 아래 외롭게 서 있는 듯했던 나무가 어느새 평온하게 보인다. 아래로 늘어진 가지에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고, 노랗게 물든 잎사귀에는 한 계절을 충실히 살아온 흔적이 배어 있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고요한 모습만으로 내 마음에 잔잔한 위안을 건넨다.
오늘 하루를 다시 돌아본다.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없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익숙한 일상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얼마나 많은 평안이 깃들어 있는지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아무 탈 없이 하루를 마칠 수 있다는 것,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창밖의 가을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다는 것. 그 소박한 순간들이 모여 삶을 따뜻하게 채워 준다.
밤은 더욱 깊어 간다.
가로등 불빛 아래 노란 잎사귀들은 여전히 고요하다. 머지않아 찬바람이 불어오면 저 잎들도 하나둘 가지를 떠날 것이다. 길고 추운 겨울이 지나기까지 나무는 앙상한 모습으로 거리를 지키겠지만, 그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봄의 생명이 조용히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기다림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잎을 잃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자연의 준비일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이는 나무도 이듬해 봄이면 다시 푸른빛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자연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기다림과 희망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 역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기보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누리는 평온함에 감사하고 싶다.
인생도 계절처럼 끊임없이 변해 간다. 푸르렀던 날들이 지나 어느덧 황금빛 가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계절에는 젊은 날에 미처 알지 못했던 깊이와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한다 해도 마음속에 품은 희망만은 언제나 봄을 향해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홀로 선 가로수 위로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다. 노란 잎들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잃지 않는다. 소란스럽던 하루가 잠든 거리에서 나무와 나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는 듯하다.
오늘도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예전에는 그저 무심히 흘려보냈을 말이지만, 이제는 그 평범한 한마디가 마음 깊은 곳에 감사로 남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냈다는 가장 따뜻한 위로일 것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남보다 앞서가지 않아도 좋다. 계절이 바뀌어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저 나무처럼, 나 또한 남은 세월을 담담하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다.
창밖에는 가을밤이 깊어 가고 있다.
가로등 아래 노랗게 물든 가로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모습에서 쓸쓸함보다 깊은 평화를 느낀다. 오늘은 지친 모습으로 가을을 보내고 있지만, 내년 봄이면 다시 싱그러운 잎을 펼쳐 나를 반갑게 맞아 줄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내가 이 창가에 서서 연둣빛으로 물든 나무를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오늘 이 가을밤에 느꼈던 고요한 평화를 떠올리며, 또 한 번 무사히 계절을 건너왔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을은 저물어도 봄은 다시 찾아온다. 나무가 새로운 잎을 틔우듯, 내 삶에도 아직 맞이하지 않은 아름다운 날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가로등 아래 단풍 든 나무 한 그루가 고요히 서 있다.
그 나무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도 어느새 평화가 내려앉는다.
오늘은 가을의 고요에 감사하고, 내일은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나는 이렇게 평범한 하루의 끝에서 삶의 깊은 행복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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