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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풍 가는 날

생각이머무는곳

글 소풍 가는 날

마음은 방, 마음의 문은 창

가을볕이 창턱을 넘어온다. 여름 내내 창가에만 머물던 빛이 책상 모서리를 지나 내 발끝까지 닿는다. 해는 짧아졌는데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깊어졌다. 나는 의자를 조금 물리고, 빛이 놓인 바닥을 한동안 바라본다.

창밖의 은행나무는 윗가지부터 노랗다. 아직 푸른 잎들 사이로 먼저 물든 잎 하나가 떨어진다. 곧장 내려앉지 못하고 몇 번 몸을 뒤집다가 길가에 닿는다. 잎이 떨어진 자리는 잘 보이지 않는데, 나무 아래에는 하루가 다르게 노란빛이 쌓인다.

마음은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는 방이다. 밖에서는 웃고 인사를 나누다가도 혼자 돌아와 앉으면 낮 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독이지 못한 슬픔, 끝내 하지 못한 말,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 오래전 무심히 들은 말 한마디가 벽에 박힌 못처럼 남아 있기도 한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그 자리를 스칠 때마다 아프다.

나는 가끔 그 방을 너무 오래 닫아 둔다. 누가 안부를 물으면 괜찮다고 답한다. 조금만 더 물어 주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다시 물으면 별일 없다는 말로 대화를 접는다. 어렵게 꺼낸 이야기가 가벼운 위로 한마디로 끝날까 봐 두렵다. 내 마음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한 날도 있다.

그렇게 돌아온 저녁이면 외투를 벗어 걸고도 한동안 불을 켜지 않는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 뒤로 방 안이 어두워진다. 낮에 삼킨 말은 사라지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또렷해진다.

방 안이 답답하면 창을 열어야 한다. 내 마음도 하나의 방이라면, 답답할 때는 창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창문을 조금 밀자 서늘한 공기가 손등에 닿는다. 길 위에서 낙엽 구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은 책상 위 종이의 귀퉁이를 들었다 놓고, 덜 마신 차의 표면을 가만히 흔든다. 나는 옷깃을 여미면서도 창을 닫지 않는다. 차가운 공기를 몇 번 들이마시고 나니 오래 웅크리고 있던 등이 조금 펴진다.

마음의 문은 어쩌면 이런 창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들이려면 흩어진 속내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지만, 창은 어질러진 방에서도 열 수 있다. 왜 힘든지 다 설명하지 못해도 “오늘은 마음이 좀 무겁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 짧은 말을 건네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혼자 되풀이하던 생각을 잠시 멈춘다.

한번은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가을 저녁,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이 어둠 속에서 차츰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받았다.

친구는 별일 없느냐고 묻더니, 밥은 먹었느냐고 다시 물었다.

아직 못 먹었다고 대답하는데 목이 메었다. 종일 괜찮다는 말은 쉽게 했으면서, 그 말은 겨우 입 밖으로 나왔다. 친구는 자기도 이제 먹으려던 참이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냉장고 문이 열리고 그릇이 부딪쳤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찬밥을 데우는 동안 친구는 집 앞 나무 이야기를 했다. 며칠 전까지 잎이 무성했는데 오늘 보니 가지가 훤하다고 했다. 나는 우리 집 앞 은행나무는 아직 노랗다고 말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떨어지지만, 아침 햇살을 받으면 나무 한 그루가 환해 보인다고.

마음을 무겁게 한 사정은 끝내 다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전화를 끊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가 국을 데우는 소리를 들으며 숟가락을 놓았다. 밥이 다 데워졌다는 소리가 나자 친구가 어서 먹으라고 했다. 나는 내일 다시 전화하겠다고 답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걱정은 남아 있었다. 다만 나는 식탁의 불을 켜고 따뜻한 밥을 먹었다. 첫술을 뜨고 나서야 배가 고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릇을 비우는 동안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설거지를 하다가 친구가 말한 나무를 떠올렸다. 잎이 드문 가지 아래로 그도 아침마다 걸어 다닐 것이다. 내일은 그 길에 서리가 내릴지도 모른다. 물을 잠그고 손을 닦으며, 다음 통화에서는 따뜻하게 입고 나가라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밥을 못 먹었다는 대답이 그날 내가 연 마음의 창이었다. 친구는 내 걱정을 걷어 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저녁을 먹는 자리까지 목소리로 함께 와 주었다. 혼자 앉은 식탁에 수화기 너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음은 방이다. 혼자 들어가 쉬어야 할 때가 있고,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 가을밤에는 창을 닫아 온기를 지켜야 하듯, 조용히 나를 돌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답답함을 견디는 일에 너무 익숙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꺼낼 틈은 남겨 두고 싶다.

오늘은 창을 조금 열어 둔다. 마른 잎 하나가 창턱에 걸려 떨다가 다시 날아간다. 바람에 들썩이는 종이를 찻잔으로 눌러 놓고, 오래 미뤄 둔 안부를 적는다.

“잘 지내니. 여기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어.”

한 줄을 쓰고 나니 묻고 싶은 일이 더 생긴다.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아침에 걷는 길은 어떤지. 나는 펜을 잠시 멈추고 가지 끝에 남은 햇빛을 바라본다.

그리고 종이 위에 한 문장을 더 보탠다.

“오늘은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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